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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독서

파리 지하철 이야기 – 지하철은 움직이는 독서실

by 빠리 슈퍼맘 2022. 4. 8.

 

봉주흐, 빠리 슈퍼 맘입니다.

 

어릴 때부터 책이 많이 많이 고팠는데, 책이 너무 귀했습니다.

 

책꽂이에 빼곡했던 누렇게 바랜 아빠책은 한자가 잔뜩 섞여 있는데다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읽는, 꼭 지금 일본 책 같았어요.

 

아빠한테 책을 사달라고 조르면 집에 저렇게 책이 많은데 저걸 읽으면 되지 않느냐 해서 새침해 하곤 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렸던 저는, 한자 가득한, 오래된 그 아빠책에 손도 대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나는 군요. 호호호

 

엄마가 어렵게 마련해 주신, 제 생애 첫 세계명작 전집은 지금도 생각하면 흥분할 정도로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책이 이렇게 이쁘고 멋지게 잘만들어졌을까... 눈이 휘둥구레지고 한눈에 반해버렸던 전집.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때 였어요.

 

집안 사정 상 빚에 허덕이며 살던 시절에, 이런 전집을 엄마가 제게 사준 것은 정말 어렵게 마련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책들을 읽고 또 읽고, 아무리 읽어대도 성에 안찼습니다.

 

매달 주기적으로 책값을 받으러 집에 오시던 분들이 계셨는데, 어린 마음에도 책 사달라고 더이상 졸라대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 밖으로 눈을 돌렸어요.

 

온갖 멋진 새 전집들로 꽉 꽉 차있는 거실을 가진 친구들 집에 가서 몇 시간씩 책장에 붙어서 눈치없이 책을 읽곤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같이 도서관이 잘 되어 있지 않았지요...

 

제가 살 던 아파트에는 디즈니 전집, 세계명작, 한국 문학 전집으로 거실이 꽉 차있던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친구들의 윤기나는 까만 피아노도 물론 부러웠지만, 제 눈이 꽂히던 곳은 벽을 빼곡히 채운 친구들의 전집들이었지요.

 

하여간 프랑스에 살면서부터는 너무도 귀해진 한국 책이 매섭게 고프더군요.

 

책이 무거워서 한국에 다녀올 때 우선적으로 가져오기도 어려웠고, 프랑스에서 구매하기도 어려웠죠. 그래서 처음에는 파리 한국 문화원에 가서 책을 빌려다 읽곤 했어요. 하지만 집에서 가깝지도 않고 반납 시일을 지켜야 하는 게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한인 사이트로 유명한 프랑스존 한위클리 벼룩시장 코너에서 책을 구매하곤 하는데요, 지인 중 한 분이 책들을 박스로 구매를 하곤 한다고 해서 저도 제가 좋아하는 책만 골라서 사지 않고 파는 책들을 전부다 한꺼번에 사곤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원하는 장소로 가져와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구매하기도 더 쉬워지고 가격도 더 저렴하게 쳐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렇게 유학생들이 읽고 저한테 팔고 가는 책들은 제가 무관심하던 분야에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건축, 역사, 철학, 심리학… 이런 분야는 저랑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책들인데 상당히 재미나는군요.

 

수십 년 갚아 나가야 하는 아파트 대출에,  아이들은 커나가고, 퇴직 후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제가 책을 맘껏 사서 읽는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저보다는 아이들 책을 먼저 사주게 되죠.

 

전 ‘언젠가 읽고 싶은 책을 원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때가 바로 내가 부자가 되어 있는 순간이겠구나’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회사에 복지혜택이 조금씩 다른데, 점심값 보조로 레스토랑에서 쓸 수 있는 수표를 주는 곳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받으면 레스토랑 가서먹지 않고 장을 봐서 식비를 아꼈어요. 점심은 도시락을 싸다녔지요 (다니던 회사 동료들이 모두 도시락을 싸다니는 편이어서 가능하기도 했나 봅니다).

 

식비가 줄어드는 만큼은 ‘안심’하고 중고책을 사 읽었습니다.

(그동안 제게 좋은 책, 저렴하게 팔고 가신 프랑스 유학생 분들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그 책들을 지하철 안에서 읽고 또 읽었어요.

 

회사 가서 일하고, 집에 가서 애기 보고 집안일 하고 … 그러다 보면 책 읽을 틈이 잘 안 납니다.

 

정신없는 일상 속에 지하철은 제게 움직이는 독서실이 되어주기 시작했네요.

 

책 읽다가 내릴 정거장을 놓치기도 해서 어리벙벙해지기도 하지만, 이 책 읽는 여유가 주는 만족감은 가히 어마어마합니다.

 

회사에 가기 싫은 날에도 지하철에서 책이라도 읽을 생각을 하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고,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할 때도 퇴근 후 발걸음이 좀 더 가볍습니다.

 

전에는 집이 너무 좁아서 책을 둘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읽은 책들 중 꼭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을 일기장에 적어 나가고 친구들에게 다 나눠 줬습니다.

 

책들과 이별하는 것도 서글퍼서 시작하게 된 것이, 책 읽은 목록을 작성하는 거였어요.

 

엑셀로 간단히 표를 만들어서 책 제목,출판사, 저자, 읽는 날짜 그리고 몇 권째읽는지 체크할 수 있게 칸을 더 넣어서 기록하기 시작했지요. 젖먹이 애기를 둔 제가 맞벌이를 하면서도 1년에 120-130권 정도까지 읽어내는 해가 있더군요. 와! (출퇴근 시간이 길어서 가능했던 일)

 

일 년에 100권은 읽어야 진짜 지성인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가 있었는데, 전 지하철 출퇴근 시간 덕분에 지성인 흉내를 내게 된 때도 있었나 봅니다.

 

책을 구하기 어려운 때는 50권도 70권도 읽기도 해요.

 

공부를 다시 한 해나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싶어 취미생활을 다 내려놓은 때는 기록을 하지도 못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그만두진 않고 계속 책 읽은 리스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쁜 노트를 사서 엑셀 리스트를 대신하고 있지요.

 

큰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제 책 리스트를 보고 자기도 만들어 달라 더군요.

 

그래서 한 장 프린트 해줬더니 아이도 열심히 책을 읽고 리스트를 채워 나갔습니다.

 

아이는 그때 그 기억을 무척 긍정적으로 남기고 있어요.

 

그런데 둘째는 … 리스트를 만들어 채워볼래? 하고 먼저 권유를 했더니

그만 도망가 버리네요. 호호호

 

이 글을 읽는 분들, 한국에서 맘껏 책 읽을수 있는 자유를 가지신 것도 큰 복이란 걸 느끼시죠?  

 

외국에서 한국책 구하기 힘든 제 생각 하시면서

더 많이 독서의 기쁨을 누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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